맨위로가기

시마무라 하야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마무라 하야오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으로,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서 활약하며 일본 해군의 발전에 기여했다. 1858년 고치현에서 태어나 해군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국 유학을 통해 해군 전술을 습득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연합함대 참모로 황해 해전 승리에 기여했으며, 러일 전쟁에서는 연합함대 참모장으로서 쓰시마 해협 해전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해군병학교 교장, 해군대학교 교장, 군령부장 등을 역임하며 해군 장교 양성 및 해군 작전을 총괄했다. 1916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20년 군령부장직에서 물러난 후 군사 참의관이 되었다. 1923년 뇌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원수 계급이 추서되었다. 그의 업적은 일본 해군 역사상 높이 평가받지만, 제국주의 팽창에 기여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사국 사람 - 존 만지로
    존 만지로는 14세에 조난당해 미국에서 10년간 생활하며 서양 문물을 습득하고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에 기여한 일본 고치현 출신의 어부이다.
  • 도사국 사람 -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는 막말 시대에 삿초 동맹을 성사시키고 대정봉환에 기여하는 등 메이지 유신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일본의 사무라이이자 혁명가이며, 그의 혁신적인 사상과 행동은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해군병학교 (일본) 교수 - 이주인 마쓰지
    이주인 마쓰지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으로, 해군 대장 이주인 고로의 아들이며 구축함 및 순양함 함장을 역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3수뢰전대 사령관으로 활동하다 전사 후 해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 해군병학교 (일본) 교수 - 야마시타 겐타로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자 화족인 야마시타 겐타로는 러일 전쟁에서 공헌하고 해군 대장까지 진급하여 연합 함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반대 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 해군 대학교 교수 - 아키야마 사네유키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일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해군병학교 수석 졸업 후 미국 유학을 통해 해양 전략을 연구하고 연합함대 참모로서 뤼순항 봉쇄 작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다.
  • 해군 대학교 교수 -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주이치는 1887년 출생하여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만 공격을 지휘한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며,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사이판 전투에서 자결하고 해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시마무라 하야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시마무라 하야오 제독, 도쿄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시마무라 하야오 제독 (국립국회도서관, 도쿄)
출생1858년 9월 21일
출생지고치시, 도사국, 일본
사망1923년 1월 8일
사망지도쿄, 일본 제국
군 복무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874년 – 1920년
최종 계급원수 해군 대장 (사후 추서)
지휘스마
하쓰세
제1함대
제2함대
해군병학교
해군대학교
사세보 진수부
주요 참전청일 전쟁
황해 해전
의화단 운동
러일 전쟁
쓰시마 해전
제1차 세계 대전
관련 인물

2. 생애

고치시(고치현) 도사국(현재의 고치현) 출신인 시마무라는 보신 전쟁 이후 일본 해군병학교 제7기생으로 입학했다. 1880년 30명의 생도 중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군 사관 후보생으로 코르벳 Japanese corvette|쓰쿠바|쓰쿠바 (군함)영어에서, 소위철갑함 Japanese ironclad warship|후소|후소 (철갑함)영어에서 복무했다.

1880년대 중반 수년간 하급 장교로 참모 업무를 위해 선발되었으며, 1888년부터 1891년까지 영국에서 유학하며 영국 해군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귀국 후 Japanese steam warship|다카오|다카오 (순양함)영어의 포술장교로 배정되었고, 1894년에 해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청일 전쟁 중에는 1894년 8월부터 1895년 4월까지 상비 함대의 참모 장교로 임명되어 전투의 종대 편성을 계획했다. 1894년 9월 17일 압록강 해전에서 순양함 Japanese cruiser|마쓰시마|마쓰시마 (방호순양함)영어에 탑승해 있다가 부상을 입었다.[3]

전후 1894년 이탈리아 해군 무관을 포함한 다양한 참모직을 역임한 후, 1899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의화단 운동 중 톈진 전투에서 순양함 Japanese cruiser|스마|스마 (방호순양함)영어와 해병대를 지휘했다.[3] 1902년부터 1903년까지는 전함 Japanese battleship|하쓰세|하쓰세 (전함)영어의 함장이었다.

러일 전쟁 직전인 1904년 6월 6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 함대의 참모장이 되었다. 제2 함대의 제2전투사령부를 지휘하면서 1905년 5월 26일 쓰시마 해전 동안 기함인 순양함 Japanese cruiser|이와테|이와테 (장갑순양함)영어에 탑승했다.[3]

전후 훈련 함대를 지휘하도록 배정되었으며,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 해군병학교 교장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해군대학 (일본) 교장을 역임했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제2 함대의 사령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사세보 진수부 사령관,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 제국 해군 참모 본부 장관을 역임했다. 시마무라는 초기에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을 지중해에 배치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이는 일본이 "진정한 위협"인 미국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1915년 8월 28일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고, 1916년 화족 작위 제도에 따라 ''단샤쿠''(남작)로 봉해졌다.

1923년 사망 후 원수 계급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2. 1. 초기 생애

고치 도사국(현재의 고치현)에서 1858년(안세이 5년) 향사 시마무라 사고요헤이와 아내 시카노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고키치였다.[3] 고치 해남 학교에서 공부했다. 어릴 적부터 수재 기질을 보였지만,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계가 어려워져 학비가 필요 없는 해군병학료 진학을 희망하여 학업에 매진했다. 16세 때, 시마무라의 재능을 들은 사법성의 관리가 양자가 되기를 권유했지만, "남자는 다른 사람의 힘으로 출세하는 것은 기개가 없는 일이다"라며 거절했다 (이때, 그의 대신 막내 동생이 양자로 들어갔다).[3]

17세에 상경하여 해군병학료 시험에 합격했다(시마무라 재학 중에 "해군병학교"로 개칭). 보신 전쟁 이후 일본 해군병학교 제7기생으로, 1880년 30명의 생도 중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군 사관 후보생으로 코르벳 Japanese corvette|쓰쿠바|쓰쿠바영어에서, 소위철갑함 Japanese ironclad warship|후소|후소영어에서 복무했다.[3]

2. 2. 청일 전쟁 이전

고치시(고치현) 도사국(현재의 고치현)에서 태어난 시마무라는 보신 전쟁 이후 일본 해군병학교 제7기생으로 입학했다. 1880년 30명의 생도 중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해군 사관 후보생으로 코르벳 Japanese corvette|쓰쿠바|쓰쿠바 (군함)영어에서, 소위철갑함 Japanese ironclad warship|후소|후소 (철갑함)영어에서, 중위대위코르벳 Japanese corvette|아사마|아사마 (코르벳)영어에서 복무했다.

해군병학교에서도 변함없이 수재였던 시마무라는, 본과에서 항상 수석을 차지하여, "병학교 7기에 시마무라 있음"이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이 병학교 시절에 영국식 해군 규율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요시마츠 시게타로나 가토 토모사부로 등과의 교분을 쌓았다.

23세에 해군병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해군 소위보가 되어, 군함 "후소"의 승무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갑판 담당 장교였던 병학교 1기 선배 사이토 마코토는, 전임 시 후임으로 누구를 추천할 거냐는 질문에 시마무라라고 즉답했다. 그 후 시마무라는 소위로 승진하여 군함 "아사마" 승무로 전임했다.

당시 일본의 이웃 국가 의 해군은, 2대의 전함 "딩위안"과 "전위안"을 갖추고 있어, 갓 태어난 일본 해군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이에 일찍부터 위기감을 느낀 시마무라는 독학으로 포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술 전문가가 군 내에 부족했던 당시, 시마무라는 아사마 승무를 유지한 채 포술 교수가 되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중위로 승진했다. 시마무라는 전술을 정리한 논문(미국 해군 군인의 저작의 초역이었지만)을 발표하거나, 전술의 실지 훈련의 연습법을 고안하는 등, 해군의 전술 발전에 기여해갔다.

참모 업무를 위해 선발된 시마무라는 1880년대 중반 수년간 하급 장교로 복무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대위로 승진한 시마무라는, 1889년(메이지 22년)부터 영국에 3년간 출장하여 영국 해군의 노하우를 배우고, 자신의 전술 입안 능력을 연마하게 된다. 1888년부터 1891년까지 영국 해군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그는 Japanese steam warship|다카오|다카오 (순양함)영어의 포술장교로 배정되었다. 그는 1894년에 해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영국에서 귀국한 시마무라는 순양함 "다카오"의 분대장 겸 포술장을 거쳐, 1893년(메이지 26년) 3월 13일, 상비함대 참모로 임명되었다. 당시 시마무라의 대위라는 계급으로 볼 때, 이는 이례적인 발탁이었다. 같은 해 5월에 상비함대 사령장관으로 취임한 이토 스케유키 중장의 휘하에서, 그는 영국식 훈련법을 철저히 시행하는 등 솜씨를 발휘했다(당시 상비함대에는 참모가 시마무라 한 명뿐이었고, 또한 이토 사령장관의 호탕하고 여유로운 성격도 있어서, 그의 의견이 그대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듬해 상비함대가 개편되어 연합함대가 되고, 이토가 사령장관에 취임하자, 시마무라 또한 연합함대 참모가 되었다. 같은 해 새롭게 사메지마 가즈노리 대좌가 참모장에 취임하여, 시마무라의 직접적인 상관이 되었지만, 사메지마는 직무를 부하에게 맡기는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시마무라의 의견이 갖는 영향력에는 변화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또한 같은 해 소좌로 승진했다.

2. 3. 청일 전쟁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당시, 시마무라 하야오는 연합함대 참모로서 참전했다.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단종진 전술을 지지하여 승리에 기여했으며, 전투 중 순양함 마쓰시마에 탑승해 있다가 부상을 입었다.[3]

전후 일본 해군 내에서 그의 역할이 높이 평가받았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청나라 제독 딩루창이 자결했을 때, 이토가 청나라에서 몰수한 군함 중 상선 "캉지호"를 돌려주고 딩루창의 시신을 보내게 한 행동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시마무라의 조언이 있었다고 한다.

2. 4. 러일 전쟁 이전

청일 전쟁 이후, 시마무라는 해군대학교 교관, 이탈리아 주재 무관 등을 역임했다.[3] 1899년(메이지 32년) 대령으로 진급, 방호순양함 "스마" 함장으로 임명되어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3] 함장 재직 시, 하사관까지 살뜰히 보살피고 사비를 들여 행사를 여는 등 함내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데 힘썼으며, 그의 근무 태도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의화단 운동 당시 펑후 섬마공에 있던 스마는 즉시 다구로 파견되어 경비를 맡았다. 시마무라는 당시 해군 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로부터 다구에 파견된 일본 해군의 사령관으로 추천되어 지휘를 맡았다. 신속하고 적절한 판단으로 지시를 내리는 한편, 스스로 초병으로 서는 등 솔선수범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그 공로로 영국 해군 중장 시모어로부터 감사의 메시지를 받았다.

2. 5. 러일 전쟁

1903년,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연합함대가 다시 조직되었고, 도고 헤이하치로 중장이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마무라는 막료의 수장인 참모장이 되었다. 이는 청일 전쟁에서의 경험으로 이토 스케유키가 강력하게 추천한 것도 컸다.[3]

러일 전쟁에 시마무라는 기함 "미카사"에 탑승하여 뤼순항 봉쇄 작전에 참여했다. 연합함대는 기뢰로 러시아 해군의 명장 스테판 마카로프를 전사시켰는데, 이때 기뢰 부설 지휘를 맡은 오다 키요조에게 작전 훈령을 기초한 것은 시마무라였다.[3] 이 사이에 해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아리마 료키치 등 막료들을 통솔하며 도고를 잘 보좌한 시마무라의 활약은 눈부셨고, 도쿄 아사히 신문과 요미우리 신문에 그를 칭찬하는 기사가 크게 실리는 등 해군 외에도 그 활약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뤼순 봉쇄 작전 종료 후 참모장 자리에서 물러나 제2함대 제2전대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그 이유로는 뤼순항 폐색 작전의 실패와 구축대 사령관의 일제 교체(황해 해전에서 구축함대의 활약이 좋지 않아, 인심 일신을 도모했기 때문. 시마무라도 이에 찬동했다) 등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스스로 사임했다고 전해진다.[3] 후임 참모장으로는 해군병학교 시절부터의 옛 친구인 가토 도모사부로를 지명했다. 또한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능력을 일찍부터 높이 평가하여 "작전은 그에게 맡겨두면 문제없다"고 보증했지만, 아키야마의 공적으로 여겨지는 것 중에는 시마무라의 발안을 계승한 것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전임 후에는 제2전대 기함 "이와테"에 탑승하여 지휘를 맡았지만, 연합함대에서의 발언력은 변함없었던 듯하다. 발트 함대를 어디에서 요격할지에 대해, 당초 작전 회의에서는 발트 함대가 쓰가루 해협 혹은 소야 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보고 연합함대를 북상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시마무라가 찬동했던 쓰시마 해협에서의 요격안이 채택되어, 일본해 해전에서의 대승의 첫걸음이 되었다.[3]

일본해 해전에서 시마무라는 스스로 항상 함교에 서서 전황을 자세히 지켜보았다. 전투 종료 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저의 경우 이번에는 별로 한가해서 아무런 할 일도 없이, 다만 전대미문의 대해전의 광경과 대승리를 拝見(배견)했을 뿐이며, 천성적으로 이만큼 유쾌함을 느낀 일은 없었소"라고 적었다.

2. 6. 러일 전쟁 이후

러일 전쟁 종결 직후인 1905년 12월 19일, 일본에 처음으로 연습함대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시마무라는 초대 사령관이 되었다.[3] 이듬해에는 해군병학교 교장, 1908년에는 중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해군대학교 교장에 보임되었다. 수년 안에 해군 장교 양성과 관련된 중요한 직책 3개를 역임한 것으로, 그의 수완이 높이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1914년에는 해군 교육 본부장도 역임했다).[3]

또한, 이 기간 동안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일본 해군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헤이그로 출장했다.[3] 1909년 제2함대 사령관,[3] 1911년 사세보 진수부 사령장관을 거쳐[3] 1914년 해군 군령부장에 취임했다.[3]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군령부장으로서 일본 해군의 작전을 총괄했다.[3] 시마무라는 초기에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을 지중해에 배치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이는 일본이 "진정한 위협"인 미국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2. 7.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일본 제국 해군 참모 본부의 장관을 역임했다. 시마무라는 초기에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을 지중해에 배치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이는 일본이 "진정한 위협"인 미국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1915년 8월 28일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16년 화족 작위 제도에 따라 단샤쿠(남작)로 봉해졌다.

1909년에 제2함대 사령장관, 1911년에 사세보 진수부 사령장관을 역임한 후, 1914년에 도쿄로 돌아와 해군 교육 본부장이 되었으나, 지멘스 사건의 여파로 이주인 고로군령부장을 사임하면서 그 후임이 되었다. 당시 해군대신은 시마무라의 친구인 가토 도모사부로였고, 해군성과의 연계는 매우 원활했다. 군령부장 재임 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승리했고, 시마무라 자신은 해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1920년, 팔팔함대의 예산안이 통과된 것을 확인하고 군령부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 야마시타 겐타로를 후임으로 추천하고 스스로는 군사 참의관이 되었다.

2. 8. 죽음

1923년 뇌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원수 계급이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3. 평가 및 영향

시마무라 하야오는 일본 해군 역사상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전략적 식견과 리더십은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특히 쓰시마 해전 직전 작전 회의에서 쓰시마 해협 잔류를 주장한 후지이 쿄이치 대장의 의견에 동의하여 회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시마무라는 해군병학교 교장 시절, 잡지 『타이요』의 "차세대 연합함대 사령장관" 독자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는 도고 사령장관과 명 참모들의 덕분이며, 자신은 특별한 공을 세운 것이 없다"며 표창을 고사했다.

한편, 그는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을 지중해에 배치하는 것에 반대하며, "진정한 위협"인 미국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4]

가정적으로는 온화한 가장으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 지바현 이치노미야정에 별장을 소유했으며, 인근에는 사이토 마코토, 가토 도모사부로, 니레이 카게노리 등 해군 출신자들의 별장이 있었다.

4. 가족 관계

항목내용
아버지시마무라 사고헤이 - 고치현사족.
어머니시카 (1838년 ~ 1917년) - 토사 향사·도쿠히로 나오사쿠의 장녀.[5]
삼촌
(어머니의 남동생)
도쿠히로 마사테루 (1855년 ~ 1936년) - 토사에서 자유민권운동에 관여, 홋카이도 개척, 유베츠 개척의 조상으로 여겨짐.[5]
남동생시마무라 시게호 (1867년생) - 도쿄 전문학교 정치과 졸업, 자유민권가, 히타치 시멘트 임원.[8][9]
아내곤도 스가오 (1880년생) - 고치현 출신 곤도 마사히데의 딸. 19세 때 22세 연상의 하야오와 결혼.[10][11]
장남시마무라 하쓰타로 (1902년생) - 습작하여 남작 작위를 계승. 제1고등학교 이과 졸업.[12]
차남다치바나 가즈오 (1907년생) - 다치바나 간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데릴사위가 되어 다치바나 백작가를 계승. 가쿠슈인 및 홋카이도 제국대학 졸업, 제실 임야국 근무 후 야나가와에서 요리 료칸 경영.[13][14]


5. 기타


  • 동향 출신인 요시마츠 시게타로 대장과는 평생 친구였다. 한학자 집안인 요시마츠는 문과가 특기였고, 시마무라는 반대로 이과에 강했다. 해군병학교 시절 시험에서 수학 문제를 다 푼 시마무라가 가부키 배우 낙서를 써서 요시마츠에게 보여줬고, 웃음을 터뜨린 요시마츠가 교관에게 꾸중을 들었다. 요시마츠는 그 장난을 진심으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 대위 시절에는 니레이 카게노리 중장의 딸 하루코와 약혼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시마무라는 영국 유학 중 낙마 사고로 이명 후유증이 남았다. 이 사실이 과장되어 일본에 보고되었기 때문에 결혼은 중단되었다. 하루코는 나중에 사이토 마코토 대장과 결혼했다. 하루코는 2·26 사건으로 남편을 잃고, 자신도 남편을 감싸다 총탄을 맞았지만, 98세까지 장수했다.

  • 낙마 사고 때 문병했던 아리마 료키치(해군 대장)를 시마무라는 평생 귀여워했다. 당시 아리마가 연구하던 일본어 수기 신호 완성을 크게 칭찬했다. 러일 전쟁에서 아리마가 진두지휘를 맡은 뤼순항 봉쇄 작전이 번번이 실패해 연합함대 참모에서 해임될 수밖에 없었지만, 시마무라 역시 스스로 연합함대 참모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아리마를 배려한 행동이라고 한다.

  • 함장 직으로는 유일하게 전함 "하츠세"를 담당했다. 조함술은 특기가 아니어서, 이시바시 하지메 부장이나 치사카 토모지로 항해장 등 현장 경험이 많은 스태프에게 맡겼다고 한다. 모토야마 항구 입항 시 이시바시 부장에게 알리지 않고 조함하여, 계류 로프를 스크루에 감아 하룻밤을 새워 풀게 된 적도 있었다.

  • 동기인 후지이 쿄이치 대장과는 정반대 성격이었지만 죽이 잘 맞았다. 쓰시마 해전 직전 작전 회의에서, 쓰시마 해협 잔류를 주장하는 후지이에게 동의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늦게 등장한 시마무라가 후지이와 같은 의견을 말하자, 회의 흐름은 단번에 쓰시마 잔류로 바뀌었다. 사생활에서도, 세든 집 임대 기간이 끝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마무라에게 후지이가 오랫동안 살던 옛집을 제공했다. 하지만 후지이의 옛집도 세든 집이었기 때문에(후지이는 자가 주택이라고 믿었다) 집주인에게 쫓겨난 시마무라는 매우 곤혹스러워했다고 한다.

  • 러일 전쟁 중 뤼순 봉쇄 작전 종료 후 시마무라로부터 연합함대 참모장을 물려받은 가토 도모사부로는 해군병학교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절친이다. 가토의 내각총리대신 취임에는 가토의 건강 상태를 염려하여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상의 헛소리 속에서 가토를 걱정하며 세상을 떠났다. 시마무라가 액년 무렵 "젊은 여성과 약혼했다"고 보도되었을 때, 가토가 신문 스크랩을 들고 "이 보도는 사실인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평생 가정에 복이 없었던 가토에게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라고 시마무라는 회고했다.

  • 가정에서는 온화한 가장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생활이 길었다.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고 알뜰한 아내를 두었으며, 아이들 교육에도 너그러웠다. 한편, 손님을 필요 이상으로 후하게 대접하느라 가계는 어려웠고, 청빈한 생활을 했다.

  • 해군대학교 교장 시절, 하쿠분칸의 잡지 『타이요』가 기획한 "차세대 적임자는 누구인가"라는 독자 투표에서 "차세대 연합함대 사령장관"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시마무라는 "러일 전쟁 승리는 오로지 도고 사령장관과 명 참모들 덕분이며, 자신은 특별한 공을 세운 것이 없다. 만약 장래에 자신이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맡아 업적을 남기고 직무를 다한다면, 그때 비로소 받겠다"라고 말하며 표창을 고사했다고 한다.

참조

[1] 문서 Nishida, Imperial Japanese Navy
[2] 웹사이트 功績は他人に譲り、失敗したときには自分が責任を取る。無欲で武士道精神に満ちた人柄 https://www.touken-w[...] Touken World 2024-05-31
[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4] 문서 Rising Sun in the Mediterranean
[5] 웹사이트 和人の定着 http://www.phoenix-c[...] 開基百年上湧別町史
[6] 논문 屯田兵村を訪ねて http://id.nii.ac.jp/[...] リベラル・アーツ : 札幌大学教養部教育研究 1990-01-15
[7] 웹사이트 『湧別原野開拓の父・徳弘正輝の物語』 http://story.engaru.[...] えんがる歴史物語、遠軽町役場 経済部 商工観光課
[8] 서적 伝蔵と森蔵 自由民権とアイヌ連帯の記録 現代史出版会 1976
[9] 웹사이트 島村茂穂 https://dl.ndl.go.jp[...] 『人事興信録』第14版 上
[10] 웹사이트 島村速雄 http://bujinkensyoka[...] 軍人顕彰会
[11] 웹사이트 島村速雄 http://jahis.law.nag[...] 『人事興信録』第4版 [大正4(1915)年1月]
[12] 웹사이트 島村初太郎 https://dl.ndl.go.jp[...] 『人事興信録』 第14版 上
[13] 웹사이트 伯爵令嬢・立花文子 https://artsandcultu[...] 立花家史料館
[14] 웹사이트 立花氏庭園の歴史 http://www.ohana.co.[...] 御花
[15] 웹사이트 17代主が語る戦国武将立花宗茂公の生涯 https://nerimachi.jp[...] 南田中のまちを考える会 2015-11-01
[16] 웹사이트 糸島人~千鳥屋糸島別荘 原田万紗子さん 自家栽培の甘夏で作ったジャムがマーマレード世界大会で銅賞に! http://kyushu.ebpark[...] 糸島市役所 シティプロモーション 2019-06-25
[17] 간행물 叙任 『官報』 1884-02-12
[18] 간행물 叙任 『官報』 1885-11-05
[1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0-11-06
[2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01-04
[2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8-03-09
[2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9-11-01
[2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4-07-19
[2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8-12-12
[2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0-12-28
[2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4-01-21
[2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7-02-12
[2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4-12-03
[2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09-28
[3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9-11-11
[3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1-11-11
[3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5-12-01
[3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6-12-30
[3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2-05-27
[3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7-24
[36] 간행물 官報 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37] 간행물 官報 第1187号「叙任及辞令」 1916-07-15
[38] 간행물 官報 第2612号「叙任及辞令」 1921-04-19
[39] 간행물 官報 第3129号「叙任及辞令」 1923-01-09
[40] 간행물 官報 第8558号「叙任及辞令」 1911-12-28
[41] 문서 다치바나 후미코 백작 부인의 남편이자 다치바나 아키노리 백작의 데릴사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